닥 No.84100
정창섭
닥 No.84100
한국 모노크롬 회화의 대표적인 작가인 정창섭(1927-2011)은 1953년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특선하며 화단에 등단하였다. 1960년대 서구적인 앵포르멜 회화의 실험을 거치고, 1970년대에 이르러 〈귀(歸)〉 연작을 통해 본격적으로 한지를 다루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나아가 한지의 원료이자 한국적 서정미를 불러일으키는 ‘닥’을 다룬 작업으로 1980년대 〈닥(楮)〉 연작과 1990년대에서 2000년대에 이어진 〈묵고(默考)〉 연작을 제작하며 그의 작업세계를 대표하는 작품을 남겼다. 그는 닥나무 중 저피(楮皮)라고 하는 참닥나무의 껍질을 주로 활용했으며, 닥을 직접 찌고 삶는 공정을 거쳐 작업을 할 정도로 닥의 성질에 세심한 관심을 가지고 다루었다. 작가의 물성에 대한 꾸준한 탐색은 닥의 고유한 조형성을 통해 한국적 추상미로 구현된다.
〈닥(楮)〉 연작 중 하나인 〈닥 No.84100〉(1984)은 닥 고유의 황토빛 색채로 여백의 미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유화의 제작과정과는 달리 화면을 그려내는 도구가 별개로 있지 않고 재료가 화면의 일부가 되는 독특한 작업 과정을 통해 닥 자체가 화면의 조형미를 구성하게 된다. 작가는 닥을 주조하여 캔버스 위에 고르게 펴고 매만지고 접합하는 등 장인적인 자세로 닥과 조우하는 방식을 거쳐 작업을 하며, 닥이 마르면서 만들어내는 우연한 조형적 결과를 그대로 화면에 섬세한 마티에르로 담아낸다.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지향했던 작가는 물질 자체의 내재적 속성을 존중하며 물성과 조우하는 작업 과정을 거쳐 작품에 은은한 여운의 멋을 남겼다.